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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 3. 25 생각
    i Pensieri 2019. 3. 25. 19:24



    지성에서 영성으로 라는 책이 있다. 이어령 박사께서 회심에 대한 글을 쓰신 것인데, 한참 화제가 되었던 책이다. 세부적인 내용은 읽어봐야겠지만 그간의 떠도는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제목 자체가 주는 울림은 크다고 생각한다.


    이어령 박사님의 딸은 김한길 전 의원과 결혼했다 이혼을 했다고만 들었다. 그가 이혼을 하게된 계기는 잘나가던 미국 검사직을 퇴직하고 청소년 사역을 하겠다는 것이었고, 후에 목사직으로 안수를 받아 봉사와 섬김으로 살다가 투병중 사망했다는 것이었다.


    똑똑하고 잘나가던(?) 딸의 죽음이라는  것이 한국을 풍미하던 지성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던 아버지에게 어떤 느낌으로 다가왔을까? 그는 한국을 이끌어가던 지성이었다. 우리가 지성을 이야기 할때에는 이해되지 않고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은 값어치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한국 지성의 대표주자에게 영성의 문제는 얼마나 허황되고 의미없는 것으로 보였을까?


    지금의 기독교는 지성을 강조해야 한다고 스스로 믿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오히려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수많은 성령체험과 신비로운 것들을 이단시하고 죄악시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새벽기도를 할때 큰소리로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예의를 지키라는 말을 해서 상처받았다는 군대 선배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그는 신경질적이었지만 신앙에선 순수한 사람이었는데, 그가 받은 상처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늘로 올라가시기전 제자들과 지내시면서 성령을 받으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 요한복음 20:22


    최근에 든 생각은 현재를 살고 있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에고, 즉 껍데기에 집중하며 살아가고 자신의 껍데기가 신앙의 척도라고 믿고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어령 박사님의 껍데기는 지성이었다. 본인이 이룩해놓은 지성의 금자탑은 수많은 인문학도들에 의해서 찬양받아졌을 것이고, 본인도 그런 선순환을 방패삼아 자신의 껍데기를 더욱 강화시켜나갔을 것이다. 고매한 지성은 내가 되어 그 지성을 붙들고 절대 놓지 않으려고 했을 것이다. 눈은 멀어졌고 귀는 어두워졌다. 영성은 그저 한낱 신기루에 불과하다고 판단해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성의 대가였던 이어령 박사님의 껍데기가 깨어진 것은 추측컨데, 딸의 아픔과 고통으로 인한 내적 갈등과 고통이 아니었을까 싶다. 다른 책에서 이어령 박사님은 스스로 장군이라 칭했다. 책상은 사열대가 되어 수많은 책들과 컴퓨터는 자신의 사열을 받는 병사와 같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런 고매한 지성도 결국 인간적 고통과 고뇌 앞에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통은 축복이다. 



    그가 영성으로 돌아가는 것은 교만했던 지성을 내려놓고 창조주가 지으신 그대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고 믿는다. 그것은 성령이다. 기독교인에게 성령은 내면에 존재하는 영성이다. 우리의 영혼이 존재하지만 성령도 우리안에 함께 하신다. 그것이 주안에 있다는 표현일 것이다. 성령은 영성이다. 바람과 같이 느낄 수 있지만 볼수 없다. 볼수 없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는 다고 판단하는 지성에게 그 의미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오직 깨어있는 자만이 그것을 느낄 수 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 마태복음 24:42


    우리는 깨어있음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깨어있음은 존재이다. 존재하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라 믿는다. 우리 안에 있는 성령을 느끼며, 성령과 함께 존재함을 자각해야 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껍데기와 에고, 또는 생각이 요구하는데로 사람들을 전도하고, 봉사하고, 그에 합당한 결과를 얻으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성령의 인도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에고가 만들어낸 환상을 따른 것이기에 만족할 수도 없고 열매를 맺을수도 없다.


    성경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이말이 명령형으로 보이지 않는다. 성령이 내안에 존재함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존재로 인해 항상 기뻐하고, 성령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즉 쉬지 않고 기도하게 되며, 지금의 현존이 내게는 커다란 축복이라는 것을 느끼기에 범사에 감사하게 된다는 것, 즉 이것은 성령충만의 상태를 나타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영성은 지성과 반대말이 아니다. 오히려 영성은 인간의 부족한 지성을 완성시켜준다. 우리가 더이상 이어령 박사님이 지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자신의 고집과 교만으로 둘둘 둘러싸맨 지성은 결국 깨어지나 영성으로 완성된다. 좀더 참다운 진리에 도달하게 되는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 글을 쓰는 나도 내 에고를 고양시키기 위해, 내가 이런 훌륭한 생각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하기 위해 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글은 실패한 글이다. 


    물이 흐르는 소리를 느끼면서 즐기는 중에 너는 물이 흐르는 소리를 모르냐고 하며 타인을 타박한다면, 물을 흐르게 만드는 것이 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지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는 나자신을 교만하게 만든다. 


    물은 내가 아니어도 흐르고, 새는 내가 아니어도 아름답게 지저귀며, 밤하늘은 내가 어찌 하지 않아도 별이 떠오르고 달이 떠오른다. 내 짧은 생각으로 진리를 가리지 말자.



    영성을 더 깊이 느끼고 싶다. 

    그것이 이어령 박사님이든, 나든, 그 누구이든 간에 실천해야 할 삶의 과제이자 의미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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